맨위로가기

웨스트민스터 총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을 위해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소집된 회의이다. 1643년 7월 1일 시작되어 1649년까지 진행되었으며, 121명의 신학자와 30명의 의회 옵저버로 구성되었다. 주요 결과물로는 공중 예배 지침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등이 있으며, 이 문서는 장로교, 회중교 등 개신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43년 잉글랜드 - 엄숙동맹과 언약
    엄숙동맹과 언약은 잉글랜드 내전 중 잉글랜드 의회가 스코틀랜드의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체결한 조약으로, 종교 개혁과 로마 가톨릭 및 주교제 근절을 목표로 했으나, 장로교에 대한 모호성으로 잉글랜드 독립파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의회파 승리에 기여했으나 왕정복고 후 폐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본 정보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장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장
다른 이름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
유형교회 회의
소집잉글랜드 의회
목적잉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 및 예식 확립
스코틀랜드 교회와의 통일
개최지웨스트민스터
기간1643년 7월 1일 ~ 1653년 3월 25일 (10년)
참석자성직자 121명
하원 의원 10명
상원 의원 5명
결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예배 모범
찬송가
역사적 맥락
배경청교도 혁명 시기, 잉글랜드 교회 개혁 필요성 증대
소집 이유잉글랜드 교회의 신앙과 예배의 통일된 기준 마련
주요 논의성경의 권위
예정론
교회 정치 (장로교, 독립교회, 에라스투스주의)
예배의 형식
주요 인물
의장윌리엄 트위스
주요 신학자사무엘 러더퍼드
조지 길레스피
토마스 굿윈
존 오웬
신학적 입장
주요 입장칼뱅주의 신학
교회 정치장로교 지지 (다수)
독립교회 (소수)
에라스투스주의 (일부)
영향
잉글랜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채택되지 못함
스코틀랜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 문서가 됨
기타전 세계 장로교 교회의 신앙 표준에 큰 영향
개혁교회 신학의 중요한 토대
참고 문헌
참고 문헌de Witt, John. Jus Divinum: The Westminster Assembly and the Divine Right of Church Government.

2. 역사적 배경

의회는 찰스 1세와 청교도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1] 청교도들은 예배 방식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거나,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관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2]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가톨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고 믿어, 교회와 국가에서 가톨릭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했다.[3] 여기에는 주교 중심의 교회 운영 방식도 포함되었다.[4]

스코틀랜드인과의 갈등 또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출된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 정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제임스 1세는 1604년부터 주교제와 공동 기도문의 일부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 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이것을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귀로 여겼다. 찰스 1세는 1636년과 163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잉글랜드의 방식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1639년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제1차 주교 전쟁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기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곧 해산했다. 1640년 제2차 주교 전쟁 이후, 찰스 1세는 더 많은 자금을 위해 또 다른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장기 의회는 찰스 1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의회에는 청교도가 많았고, 청교도에 동조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주교 중심의 교회 운영 방식에 반대했지만, 교회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1640년 말, 루트 앤 브랜치 청원이 잉글랜드 하원에 제출되었다. 이 청원에는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서명했으며, 주교 중심 체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의회의 청교도들은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5차례나 회의 소집을 요구했지만, 찰스 1세는 매번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의 조례로 준비된 회의 소집은 5번째에 겨우 가결되었고, 귀족원에 의해 1643년 6월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유효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의 한가운데 소집되었고, 아일랜드의 가톨릭이 찰스 1세 편에 서서 반란에 가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엄숙한 동맹과 계약이 체결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을 하고, 가장 잘 개혁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가톨릭적인 감독제의 근절을 요구했고, 6명의 스코틀랜드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가했다.

2. 1. 잉글랜드 종교 개혁과 청교도 운동의 대두

1645년에 제작된 이 풍자화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청교도 헨리 버튼을 묘사하고 있다. 버튼은 로드를 비판한 죄로 귀가 잘린 상태이며, 그들의 대화는 의회에 의한 재판 후 로드의 처형을 언급하고 있다.


의회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주인 찰스 1세와 청교도 간의 적대감이 심화되던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1] 청교도들은 예배 관행이 성경에 의해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그들의 반대자들은 전통 관습에 더 큰 권위를 부여했다.[2] 영국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가톨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믿은 청교도들은 교회와 국가에서 이러한 잔재를 제거하려 했다.[3] 여기에는 주교 정치 또는 주교 계층에 의한 교회 통치가 포함되었다.[4] 분리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들은 기존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5] 찰스 치하에서 청교도의 반대자들은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특히 163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윌리엄 로드가 두드러졌다. "고교회파"는 소수였음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견해를 사적으로 유지하거나 벌금과 투옥에 직면해야 했다.[6] 로드는 청교도의 개혁 신학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주의 옹호자들을 장려했고, 성찬 시 무릎 꿇기, 그리스도의 이름에 묵례하기, 교회 동쪽에 성찬상을 배치하는 것과 같은 예배 관행도 부활시켰다. 청교도들에게 이것은 가톨릭으로 향하는 발걸음처럼 보였다.

국왕과 스코틀랜드인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출된 의회를 특징으로 하는 장로교 정치 시스템으로 통치되었다. 제임스는 찰스의 스코틀랜드 국왕 선임자였으며, 1604년부터 주교 교회 정부와 공동 기도문의 요소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할 의도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찰스는 1636년과 163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잉글랜드의 강요를 더욱 강화했다. 이로 인해 1639년 찰스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제1차 주교 전쟁이 발생했다. 찰스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단기 의회를 소집했지만,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곧 해산했다. 1640년 스코틀랜드와의 제2차 주교 전쟁 이후 찰스는 추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장기 의회로 알려진 이 의회는 찰스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이 종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의회에는 많은 청교도와 청교도 동조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주교 체제에 반대했지만, 교회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1640년 후반, 잉글랜드 하원에 제출된 루트 앤 브랜치 청원은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서명했으며, 주교 체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종교 개혁을 제정하기 위해 하원에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청교도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청교도 반대자들에게 심각한 처벌을 가했던 고등 위원회와 스타 체임버도 폐지되었다.

2. 2. 찰스 1세의 종교 정책과 청교도 탄압

의회는 찰스 1세와 청교도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1] 청교도들은 예배 방식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거나,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관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2]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가톨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에서 가톨릭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했다.[3] 여기에는 주교 중심의 교회 운영 방식도 포함되었다.[4] 분리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5]

찰스 1세는 청교도의 반대자들을 높은 자리에 임명했다. 특히, 고교회파가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1633년에 윌리엄 로드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거나, 벌금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6] 로드는 청교도의 개혁 신학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성찬식 때 무릎 꿇기, 그리스도의 이름에 고개 숙여 인사하기, 교회 동쪽에 성찬상을 놓는 것과 같은 예배 방식도 다시 도입되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변화가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국왕과 스코틀랜드인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출된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 정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찰스 1세의 선임자인 제임스 1세는 1604년부터 주교 중심의 교회 운영 방식과 공동 기도문을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것을 가톨릭으로의 회귀로 여겼다. 찰스 1세는 1636년과 163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잉글랜드의 방식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1639년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제1차 주교 전쟁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기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곧 해산했다. 1640년 제2차 주교 전쟁 이후, 찰스 1세는 추가 자금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장기 의회로 알려진 이 의회는 찰스 1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이 종교적인 문제였다. 의회에는 청교도가 많았고, 청교도에 동조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주교 중심의 교회 운영 방식에 반대했지만, 교회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1640년 후반, 루트 앤 브랜치 청원이 잉글랜드 하원에 제출되었다. 이 청원에는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서명했으며, 주교 중심 체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종교 개혁을 위해 하원에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청교도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런던 탑에 갇혔다. 청교도 반대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던 고등 위원회와 스타 체임버도 폐지되었다.

2. 3. 스코틀랜드와의 갈등과 주교 전쟁

의회는 찰스 1세와 청교도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1] 청교도들은 예배 방식이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거나,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파들은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2]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에서 이러한 가톨릭의 잔재를 없애려 했다.[3] 여기에는 주교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 정치도 포함되었다.[4] 분리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5] 찰스 1세는 청교도의 반대자들을 높은 자리에 임명했는데, 특히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윌리엄 로드가 대표적이었다. 윌리엄 로드는 고교회파라는 소수파였음에도 대주교가 되었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벌을 받거나 감옥에 가야 했다.[6] 로드는 청교도의 개혁 신학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성찬 때 무릎 꿇기, 그리스도의 이름에 절하기, 교회 동쪽에 성찬상을 놓는 것과 같은 예배 방식도 다시 시작되었다. 청교도들은 이것이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왕과 스코틀랜드인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출된 의회가 중심이 되는 장로교 정치라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제임스 1세는 1604년부터 주교제와 공동 기도문의 일부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것을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찰스 1세는 1636년과 163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잉글랜드의 강요를 더욱 강화했다. 이로 인해 1639년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제1차 주교 전쟁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기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곧 해산했다. 1640년 스코틀랜드와의 제2차 주교 전쟁 이후, 찰스 1세는 더 많은 자금을 위해 또 다른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장기 의회라고 불리게 된 이 의회는 찰스 1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의회에는 청교도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의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주교제를 반대했지만, 교회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1640년 말, 루트 앤 브랜치 청원이 잉글랜드 하원에 제출되었다. 이 청원에는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서명했으며, 주교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종교 개혁을 위해 하원에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청교도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런던 탑에 갇혔다. 청교도 반대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던 고등 위원회와 스타 체임버도 폐지되었다.

1644년, 의회가 총회에게 "지독하게 무지하고 현저하게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성찬 참여를 금지하라는 요청을 무시하면서, 총회와 의회 간의 관계는 이미 나빠지기 시작했다. 의원들은 성찬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많은 의원들은 누가 출교 권한을 갖는지에 대해 총회의 장로교 다수와 의견이 달랐으며, 국가가 그 권한을 갖는다는 에라스투스주의적 견해를 가졌다. 1646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의 신형군이 의회를 위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크롬웰은 군대의 다수와 함께, 국가 교회가 장로교로 유지된다 하더라도 모든 종류의 기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의 군사적 승리로 인한 권력 장악은 다른 사람들의 예배의 자유 없이 엄격한 장로교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의회는 적어도 어떤 죄가 교회에 의해 출교를 유발할 만큼 심각한지 알고 싶어 했지만, 총회는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꺼렸다. 다수는 이 분야에서 교회의 권한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645년 5월, 의회는 출교자들이 교회의 판결에 의회에 항소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10월 20일의 또 다른 법령에는 교회가 출교 권한을 행사하는 데 제한을 받을 죄목 목록이 포함되었다. 1646년 3월에는 더욱 에라스투스주의적인 법령이 제안되었다. 총회는 항의서를 발표했고, 이는 하원이 특권 침해를 이유로 총회를 고발하고 문제에 대해 아홉 가지 질문을 신학자들에게 제출하도록 유발했다. 답변과 함께 투표 결과가 포함되어, 항의 청원에 관련된 신학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결국 "아홉 가지 질문"으로 불리게 된 이 질문들은 교회의 권한이 신성한 권리(jure divino)에 기인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장로교 신학자들은 성경에 의해 확립된 교회의 권한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을 옹호할 수 있었지만, 질문에 답하는 것을 꺼렸다. 그렇게 하는 것은 총회의 분열을 더욱 드러내고 의회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1647년 7월, 신형군이 런던을 침공했고, 의회의 보수적인 의원들은 축출되었다. 의회는 종교적 관용을 확립하고 총회의 국가적, 강제적인 장로교회의 비전이 실현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장로교 지지가 가장 컸던 런던에서는 108개 시 교구 중 64곳에서만 장로교회가 설립되었고, 지역 장로교 클래스는 잉글랜드 40개 카운티 중 14곳에서만 형성되었다. 계획되었던 전국 총회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장로교인들은 1660년 왕정복고까지 사실상 자유 교회 상황에서 자발적인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강제적인 주교 제도가 부활했다.

새로운 정부 형태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 훨씬 더 수용 가능했다. 그들은 1645년 2월 10일에 이 형태를 통과시켰으며, 곧 나올 교회 정부 지침서에서 다루어질 장로교 정부의 특정 세부 사항을 전제로 했다. 동시에 그들은 두 교회를 공식적으로 통합하려는 열망을 발표했다. 크롬웰의 부상과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이 찰스 1세와 맺은 비밀 약속 이후 이러한 희망은 포기되었고, 이 문서들은 결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2. 4. 장기 의회 소집과 청교도의 요구



의회는 찰스 1세와 청교도 간의 적대감이 심화되던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1] 청교도들은 예배 관행이 성경에 의해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반대자들은 전통 관습에 더 큰 권위를 부여했다.[2] 영국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교회가 여전히 가톨릭에 너무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믿었던 청교도들은, 교회와 국가에서 이러한 잔존하는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했다.[3] 여기에는 주교 계층에 의한 통치인 주교 정치도 포함되었다.[4] 분리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들은 기존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5] 찰스 치하에서 청교도의 반대자들은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특히 "고교회파"가 소수였음에도 163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윌리엄 로드가 두드러졌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견해를 사적으로 유지하거나 벌금과 투옥에 직면해야 했다.[6] 로드는 청교도의 개혁 신학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주의 옹호자들을 장려했고, 성찬 시 무릎 꿇기, 그리스도의 이름에 묵례하기, 교회 동쪽에 성찬상을 배치하는 것과 같은 예배 관행도 부활시켰다. 청교도들에게 이것은 가톨릭으로 향하는 발걸음처럼 보였다.

국왕과 스코틀랜드인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선출된 의회를 특징으로 하는 장로교 정치라는 시스템에 의해 통치되었다. 찰스의 스코틀랜드 국왕 선임자인 제임스는 1604년부터 주교 교회 정부와 공동 기도문의 요소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할 의도가 있음을 분명히 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찰스는 1636년과 163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잉글랜드의 강요를 더욱 강화했다. 이로 인해 1639년 찰스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제1차 주교 전쟁이 발생했다. 찰스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단기 의회를 소집했지만,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곧 해산했다. 1640년 스코틀랜드와의 제2차 주교 전쟁 이후 찰스는 추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1]

장기 의회로 알려지게 된 이 의회는 찰스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이 종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의회에는 많은 청교도와 청교도에 동조하는 의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주교 체제에 반대했지만, 교회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1640년 후반에 루트 앤 브랜치 청원이 의회 하원인 잉글랜드 하원에 제출되었다. 이 청원은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서명했으며, 주교 체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종교 개혁을 위해 하원에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청교도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청교도 반대자들에게 심각한 처벌을 가했던 고등 위원회와 스타 체임버도 폐지되었다.

의회의 청교도들은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5차례나 회의 소집을 요구했지만, 찰스 1세는 매번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의 조례로 준비된 회의 소집은 5번째에 겨우 가결되었고, 귀족원에 의해 1643년 6월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유효하게 되었다. 회의는 30명의 신도(10명의 귀족과 20명의 일반인)와 121명의 신학자와 목사로 구성되었다.

교역자는 네 개의 파의 대표들로부터 선출되었다.

구분
감독제주의자
장로 주의자
회중 주의자
에라스투스주의자



첫 회의는 1643년 7월 1일에 열렸다. 회의는 1643년부터 1649년까지 1163회 열렸으며,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된 적은 없었다. 의회는 신학자들에게 하루에 4실링을 지급했다. 회의에 처음 주어진 임무는 국교회 39개 조항의 개정이었다.

회의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의 한가운데였고, 아일랜드의 가톨릭이 찰스 1세 편에 서서 반란에 가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엄숙한 동맹과 계약이 체결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을 하고, 가장 잘 개혁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가톨릭적인 감독제의 근절을 요구했고, 6명의 스코틀랜드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했다.

3. 총회 소집과 진행 과정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잉글랜드 의회의 주도로 소집되어 1649년까지 진행된 종교 회의이다. 총회 소집은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교회 개혁을 통해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의회는 1641년부터 교회 개혁을 위한 신학자 회의 소집을 추진했으나, 찰스 1세는 이를 거부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의회는 1643년 6월 왕의 동의 없이 총회 소집을 강행했다.

총회에는 121명의 목사와 하원 20명, 귀족원 10명으로 구성된 30명의 의회 옵저버가 참여했다. 의회는 윌리엄 트위스를 총회 의장(프롤로큐터)으로 임명했으나, 그의 건강 문제로 코넬리우스 버지스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의장 대행을 맡았다. 총회는 의회의 엄격한 통제하에 운영되었으며, 의회가 제시한 주제에 대해서만 토론할 수 있었다.

총회는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 트위스의 설교로 첫 회의를 열었고, 이후 헨리 7세 예배당과 예루살렘 챔버에서 회의를 이어갔다. 총회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39개조 신조를 개정하고 새로운 신앙 기준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스코틀랜드는 엄숙한 동맹과 언약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동맹 조건으로 교회 개혁을 요구했고, 6명의 스코틀랜드 위원이 총회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총회에서 투표권은 없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총회에서는 교회 정치 체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대립했다. 장로회 다수파 외에도, 주교제를 옹호하는 소수파, 회중주의를 지지하는 "반대 형제들", 국가의 교회 통제를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이 있었다. 특히 에라스투스주의 논쟁에서는 존 셀든이 교회 징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주장했으나, 조지 길레스피의 반박으로 무산되었다.

1643년 10월, 의회는 총회에 교회 정부 형태에 대한 권고를 요청했고, 총회는 39개조 신조 수정을 중단하고 새로운 신앙 기준 작성에 착수했다. 4년간의 논의 끝에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이 작성되었으나, 교회 정치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3. 1. 총회 소집 배경

Inscription depicting two houses of Parliament and the Westminster Assembly on an ark. Various figures are drowning in the flood. Portraits of other figures surround the scene.


의회에 교회의 추가 개혁에 관해 자문할 국가 신학자 회의의 아이디어는 1641년 하원에 처음 제시되었다. 그러한 제안은 그해 12월 1일 의회가 찰스 1세에게 제출한 불만 사항 목록인 대항의서에도 포함되었다.[2] 찰스 1세는 12월 23일에 교회 개혁이 필요 없다고 응답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회는 1642년에 총회를 임명하고 구성원을 의회가 선택하도록 규정하는 3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발효되려면 국왕의 재가가 필요했던 찰스 1세는 성직자가 구성원을 선택하는 경우에만 그러한 총회를 고려할 의향이 있었다. 이는 컨보케이션 구성원을 선출하는 관행으로, 잉글랜드 국교회의 성직자 회의였다.[3]

왕에게 맞서, 1642년 2월 12일부터 4월 20일 사이에 하원의 각 잉글랜드 카운티 대표는 각 웨일스 카운티에 2명, 런던에 4명, 각 대학교 (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2명씩, 총 2명의 성직자를 선택했다. 카운티 대표들은 종종 자신의 카운티 출신의 성직자를 선택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원은 지방 선거구가 결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구성원을 선택했다.[4] 의회의 상원인 귀족원은 5월 14일에 다른 14명의 이름을 추가했고, 하원은 이에 동의했다.[5] 한편, 왕과 의회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찰스 1세는 8월 22일 노팅엄에서 왕실 기를 게양하며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 전쟁의 시작은 의회에서 총회 소집이라는 명분에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총회를 개최하면 스코틀랜드가 의회가 교회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여 스코틀랜드가 지원을 요청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쟁은 이미 바쁜 의회에 부담을 더했다.[6]

의회는 마침내 1643년 6월 12일에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자체 권한으로 총회를 개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조례는 121명의 목사와 30명의 비투표 의회 옵저버(하원 출신 20명, 귀족원 출신 10명)를 지명했다. 총회는 거의 전적으로 잉글랜드인이었다. 의회는 웨일스 카운티에 잉글랜드인을 임명했지만, 프랑스 이방 교회(가톨릭 프랑스에서 온 개신교 난민의 교회)는 채널 제도 출신 대신 두 명의 목사를 보냈다.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 고대 언어, 교부학, 스콜라 신학의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이었고, 유명한 설교가이기도 했다. 이들 대부분은 윌리엄 로드의 재임 기간 동안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일부는 교회에서 추방되었거나 자신의 견해로 인해 교회 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일부는 대륙으로 도망갔고, 한 명은 미국 식민지로 도망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자신을 잉글랜드 국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했으며 감독 서품을 받았다. 대부분은 순응주의자였으며, 이는 1558년 통일령과 일반 기도서를 따르기로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총회는 의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의회가 지시한 주제에 대해서만 토론해야 했다. 총회 구성원은 다수 의견에 대한 불일치를 진술하거나 절차에 대한 정보를 의회에 서면으로 공유하는 것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의회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신학자인 윌리엄 트위스를 총회의 프롤로큐터(의장)로 선택했다. 트위스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의회가 여러 보좌관 중 한 명으로 임명한 코넬리우스 버지스가 총회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롤로큐터 대행을 맡았다. 총회에 임명된 22명의 구성원은 1649년 전에 사망했으며, 다른 이유로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다른 19명의 구성원으로 교체되었다. 1643년에는 세 명의 비투표 서기도 추가되었다.

3. 2. 총회 구성원

1642년 2월 12일부터 4월 20일 사이에 하원의 각 잉글랜드 카운티 대표는 각 웨일스 카운티에 2명, 런던에 4명, 각 대학교 (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2명씩, 총 2명의 성직자를 선택했다. 카운티 대표들은 종종 자신의 카운티 출신의 성직자를 선택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원은 지방 선거구가 결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구성원을 선택했다.[1] 의회의 상원인 귀족원은 5월 14일에 다른 14명의 이름을 추가했고, 하원은 이에 동의했다.[2]

의회는 1643년 6월 12일에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자체 권한으로 총회를 개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3] 이 조례는 121명의 목사와 하원 출신 20명, 귀족원 출신 10명으로 구성된 30명의 비투표 의회 옵저버를 지명했다.[4] 총회는 거의 전적으로 잉글랜드인이었다. 의회는 웨일스 카운티에 잉글랜드인을 임명했지만, 프랑스 이방 교회 (가톨릭 프랑스에서 온 개신교 난민의 교회)는 채널 제도 출신 대신 두 명의 목사를 보냈다.[5]

총회에 임명된 22명의 구성원은 1649년 전에 사망했으며, 다른 이유로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다른 19명의 구성원으로 교체되었다. 1643년에는 세 명의 비투표 서기도 추가되었다.[6]

총회는 의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의회가 지시한 주제에 대해서만 토론해야 했다. 총회 구성원은 다수 의견에 대한 불일치를 진술하거나 절차에 대한 정보를 의회에 서면으로 공유하는 것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의회는 신학자인 윌리엄 트위스를 총회의 프롤로큐터 또는 의장으로 선택했다. 윌리엄 트위스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의회가 여러 보좌관 중 한 명으로 임명한 코넬리우스 버지스가 총회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롤로큐터 대행을 맡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구성원
구분내용
신학자윌리엄 트위스(프롤로큐터), 코넬리우스 버지스(프롤로큐터 대행) 등 121명의 목사
의회 옵저버하원 출신 20명, 귀족원 출신 10명 (비투표)
기타서기 3명 (비투표)


3. 3. 총회 진행

의회에 교회의 추가 개혁에 관해 자문할 국가 신학자 회의의 아이디어는 1641년 하원에 처음 제시되었다. 그러한 제안은 의회가 그해 12월 1일 찰스 1세에게 제출한 불만 사항 목록인 대항의서에도 포함되었다.[1] 찰스 1세는 12월 23일에 교회 개혁이 필요 없다고 응답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회는 1642년에 총회를 임명하고 구성원을 의회가 선택하도록 규정하는 3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발효되려면 국왕의 재가가 필요했는데, 찰스 1세는 성직자가 구성원을 선택하는 경우에만 그러한 총회를 고려할 의향이 있었다. 이는 컨보케이션 구성원을 선출하는 관행이었으며, 잉글랜드 국교회의 성직자 회의였다.[2]

왕을 거스르며, 1642년 2월 12일부터 4월 20일 사이에 하원의 각 잉글랜드 카운티 대표는 각 웨일스 카운티에 2명, 런던에 4명, 각 대학교 (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2명씩, 총 2명의 성직자를 선택했다. 카운티 대표들은 종종 자신의 카운티 출신의 성직자를 선택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원은 지방 선거구가 결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구성원을 선택했다.[3] 의회의 상원인 귀족원은 5월 14일에 다른 14명의 이름을 추가했고, 하원은 이에 동의했다.[4] 한편, 왕과 의회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찰스 1세는 8월 22일 노팅엄에서 왕실 기를 게양하며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 전쟁의 시작은 의회에서 총회 소집이라는 명분에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총회를 개최하면 스코틀랜드가 의회가 교회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여 스코틀랜드가 지원을 요청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쟁은 이미 바쁜 의회에 부담을 더했다.[5]

의회는 마침내 1643년 6월 12일에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자체 권한으로 총회를 개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6] 이 조례는 121명의 목사와 30명의 비투표 의회 옵저버(하원 출신 20명, 귀족원 출신 10명)를 지명했다. 총회는 거의 전적으로 잉글랜드인이었다. 의회는 웨일스 카운티에 잉글랜드인을 임명했지만, 프랑스 이방 교회(가톨릭 프랑스에서 온 개신교 난민의 교회)는 채널 제도 출신 대신 두 명의 목사를 보냈다.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 고대 언어, 교부학, 스콜라 신학의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설교가이기도 했다. 이 신학자들 대부분은 윌리엄 로드의 재임 기간 동안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일부는 교회에서 추방되었거나 자신의 견해로 인해 교회 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일부는 대륙으로 도망갔고, 한 명은 미국 식민지로 도망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자신을 잉글랜드 국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했으며 감독 서품을 받았다. 대부분은 1558년 통일령과 일반 기도서를 따르기로 동의한 순응주의자였다.

총회는 의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의회가 지시한 주제에 대해서만 토론해야 했다. 총회 구성원은 다수 의견에 대한 불일치를 진술하거나 절차에 대한 정보를 의회에 서면으로 공유하는 것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의회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신학자인 윌리엄 트위스를 총회의 프롤로큐터(의장)로 선택했다. 트위스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의회가 여러 보좌관 중 한 명으로 임명한 코넬리우스 버지스가 총회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롤로큐터 대행을 맡았다. 총회에 임명된 22명의 구성원은 1649년 전에 사망했으며, 다른 이유로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다른 19명의 구성원으로 교체되었다. 1643년에는 세 명의 비투표 서기도 추가되었다.

총회의 첫 회의는 1643년 7월 1일, 윌리엄 트와이스의 설교로 웨스트민스터 사원본당에서 시작되었다. 본당이 너무 붐벼 하원은 의원들을 먼저 보내 자리를 확보해야 했다. 설교 후, 신학자들은 행진하여 헨리 7세 예배당으로 갔고, 그곳은 10월 2일 그들이 더 따뜻하고 사적인 예루살렘 챔버로 옮겨갈 때까지 회의 장소가 될 것이다. 초기 회의 후, 의회가 아직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아 약 일주일 동안 정회했다.

7월 6일, 그들은 의회로부터 일련의 규칙을 받고, 잉글랜드 교회의 현재 교리적 기준인 39개조 신조의 처음 10개조를 검토하고 "거짓 해석의 모든 비방으로부터 그들의 교리를 자유롭게 하고 옹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루의 금식 후, 총회는 의회의 지시에 따라 "내 양심에 비추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유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신학자들은 세 개의 상설 위원회를 조직했지만, 각 위원회는 총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열려 있었다. 위원회는 매일 아침 위원회 회의 후, 전체 총회에서 토론할 주제를 할당받고 제안서를 준비했다. 또한, 후보 설교자, 대학 연구원, 이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것과 같은 업무를 위해 200개 이상의 임시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총회는 약간의 논의 끝에, 39개조 신조의 모든 교리는 성경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총회 구성원들은 장황한 연설을 하는 경향이 있어 진전이 더뎠고, 이는 지도부를 좌절시켰다. 39개조 신조의 여덟 번째 조항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기본적인 정통 신앙 고백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고 믿을 것을 권고했다. 총회는 신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신조를 "철저히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기존의 표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전자의 입장을 취한 "예외자"들은 조항이 신조의 "내용"만 믿을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8월 25일, 해당 조항은 나머지 조항을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 보류되었다. 이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초기 의견 불일치는 총회 내 다양한 파벌 간의 깊은 분열을 드러냈다.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면서, 잉글랜드 의회(롱 팔리아멘트)는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군사 동맹의 대가로,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가 1643년에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언약은 잉글랜드가 그들의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와 더 일치하도록 할 것을 규정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커미셔너들을 런던으로 보내 잉글랜드 의회에 스코틀랜드의 이익을 대변하게 했다. 이들 중 11명(신학자 4명과 의원 7명)도 총회에 초대되었다. 커미셔너들에게는 총회의 정식 투표 회원이 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국의 교회와 교회의 커미셔너로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여 거절했다. 사무엘 루더포드, 조지 길레스피, 알렉산더 헨더슨이 커미셔너들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컸다.

1643년 10월 12일, 의회는 총회에 39개 조항에 대한 작업을 중단하고 두 국가를 위한 공통적인 교회 정부 형태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총회는 교회 정부 문제에 전체 회의 시간의 4분의 1을 할애했다. 총회 구성원 대다수는 평신도와 성직자 대표로 구성된 선출된 회의에 의한 교회 정부인 장로교 정치 체제를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교리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다. 이 그룹의 여러 구성원(약 20명, 윌리엄 트위스 포함)은 장로교의 요소와 주교의 역할을 줄이는 "원시적인" 주교제를 선호했다.

또한 개별 지역 교회의 자율성을 선호하는 여러 회중 정치 체제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은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시드라크 심슨,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윌리엄 브리지였다. 그들은 종종 총회에서 "반대 형제"라고 불렸으며, 때때로 "독립파"로 불렸지만 이 용어를 거부했다. 총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독립파"라는 용어를 기존 교회에서 탈퇴한 분리주의자들에게 사용했다. 회중주의 신학자들은 분리주의자 및 브라운주의자들과 동일시될 수 없는데, 그들은 주교 서임을 받아들이고 잉글랜드 교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진행 중인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뉴 모델 육군의 성공에 의해 지원받았다. 크롬웰과 군대의 많은 사람들은 회중주의를 지지했다.

세 번째 그룹의 신학자들은 에라스티안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국가가 교회에 상당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총회 전체는 의회가 소집했고 완전히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는 점에서 에라스티안적이었다. 총회에서 "에라스티안"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교회 직원이 아닌 시민 권위가 교회 징계의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성찬을 거부하는 권한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어떤 특정 형태의 교회 정부도 신성하게 위임되었다고 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반대 형제들은 장로교가 회중주의에 대해 의회보다 훨씬 덜 관용적일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자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총회에는 존 라이트풋과 토마스 콜먼의 두 신학자만이 에라스티안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존 셀든을 비롯한 의회 구성원의 존재와 의회의 총회 감독이라는 사실이 에라스티안의 견해에 과도한 영향을 미쳤다.

기존 주교 시스템의 지지자인 여러 주교주의자들도 소환 조례에 포함되었지만, 의회는 찰스가 총회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회에 더 큰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을 임명했을 뿐, 참석을 기대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단 한 명, 다니엘 피틀리만이 참여했고, 1643년 10월 반역죄로 체포될 때까지였다.

교회 직원에 대한 논쟁은 10월 19일에 시작되었다. 총회는 많은 신학자들이 다양한 종파 운동의 부상과 기존 교회의 목사 서임에 대한 메커니즘 부족에 대해 우려했기 때문에 서임 문제로 시작했다. 일부 구성원들은 설교자에게 서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그들은 서임 없이는 성찬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서임 없는 정규 설교는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서임의 목적으로 임시 장로회(교회 정치체제)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 초기 단계에서 가시적 교회의 본질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회중주의자들은 교회를 단일 지역 회중으로 간주했지만, 다수는 국가 교회를 하나의 단일체로 간주했으며 붕괴된 잉글랜드 교회의 전망에 경고했다.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1643년 말까지 모든 관련 당사자에게 만족스러운 공통 교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1644년 1월 3일 또는 4일, 다섯 명의 주요 반대 형제는 의회에 호소하는 논쟁적인 팸플릿인 ''변론적 이야기''를 출판하면서 총회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결별을 알렸다. 그것은 회중주의 시스템이 장로교보다 종교 문제에 대한 국가 통제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은 교회가 일탈적인 회중으로부터 교제를 철회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실제 권력도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17일까지, 총회의 대다수는 스코틀랜드와 유사한 장로교 시스템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했지만, 반대 형제들은 결국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입장을 진술하도록 허용되었다. 장로교가 신성한 권리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회중주의자들이 수용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1일에는 그룹들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반대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반대 형제 중 한 명인 필립 나이는 한 연설에서 지역 회중 위에 세워진 장로교가 국가만큼 강력해지고 연방에 위험하다고 주장하여 장로교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총회는 마침내 장로교 정부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인해, 총회는 1644년 내내 반대 형제들을 다수와 화해시키기 위한 방법을 계속 찾았으며, 3월에는 그 목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11월 15일, 반대 형제들은 나머지 총회에 대한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의회에 제시했고, 12월 11일에는 다수가 장로교 정부 형태의 초안을 제출했다.

의회의 청교도들은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5차례나 회의 소집을 요구했지만, 찰스 1세는 매번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의 조례로 준비된 5번째 요구가 귀족원에 의해 1643년 6월,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가결되었다. 회의는 30명의 신도(10명의 귀족과 20명의 일반인)와 121명의 신학자 및 목사로 구성되었다.

교역자는 네 개의 파의 대표들로부터 선출되었다.

첫 회의는 1643년 7월 1일에 열렸다. 회의는 1643년부터 1649년까지 1163회 열렸으며,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된 적은 없었다. 의회는 신학자들에게 하루에 4실링을 지급했다. 회의에 처음 주어진 임무는 국교회 39개 조항의 개정이었다.

제1차 잉글랜드 내전 중에 아일랜드의 가톨릭이 찰스 1세 편에 서서 반란에 가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에 도움을 요청했고, 엄숙한 동맹과 계약이 체결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을 하고, 가장 잘 개혁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가톨릭적인 감독제의 근절을 요구했다. 그리고 6명의 스코틀랜드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했다.

1643년 10월 12일,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의회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합당하고, 교회와 가정을 보호하며, 스코틀랜드 교회와 다른 개혁 교회와 일치된, 계율과 교회 정치"에 대한 권고를 받았다. 회의는 그것을 받아 39개 조항의 수정을 멈추고, 새로운 신앙 기준 작성에 착수했다. 4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만들었다. 하원은 이에 근거 성구를 요구했다.

교회 정치에 대해 4개의 파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3. 4. 에라스투스주의 논쟁

존 셀든은 교회 안에서의 교인의 파면에 대하여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지 길레스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것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이 국가의 법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로 반드시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함을 확인한 것이었다. 존 셀든은 조지 길레스피의 의견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총회는 교회 정부 문제에 전체 회의 시간의 4분의 1을 할애했다. 총회 구성원 대다수는 평신도와 성직자 대표로 구성된 선출된 회의에 의한 교회 정부인 장로교 정치 체제를 지지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교리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다.

에라스티안으로 알려진 세 번째 그룹의 신학자들은 국가가 교회에 상당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총회 전체는 의회가 소집했고 완전히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는 점에서 에라스티안적이었다. 총회에서 "에라스티안"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교회 직원이 아닌 시민 권위가 교회 징계의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성찬을 거부하는 권한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어떤 특정 형태의 교회 정부도 신성하게 위임되었다고 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반대 형제들은 장로교가 회중주의에 대해 의회보다 훨씬 덜 관용적일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자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총회에는 존 라이트풋과 토마스 콜먼 두 신학자만이 에라스티안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존 셀든을 비롯한 의회 구성원의 존재와 의회의 총회 감독이라는 사실이 에라스티안의 견해에 과도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 정치에 대해 4개의 파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4. 총회의 주요 결과물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교회 정치에 대한 논쟁 동안과 그 이후에도 여러 중요한 문서들을 작성했다.


  • '''공중 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Public Worship)'''


공동 기도서를 대체하기 위해 1644년에 작성되어 1645년 1월 3일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채택된 ''지침서''는 장로교와 회중교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장로교는 고정된 전례를 선호했고, 회중교는 즉흥적인 기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지침서''는 예배 순서와 예시 기도문으로 구성되었다.[1] 총회는 프랜시스 라우스(Francis Rous)에게 예배에서 사용할 시편 번역을 권고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


1646년 8월에 서른아홉 개 조항을 대체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신앙 고백 작성 과정에 대한 총회 활동 기록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교리에 대해 총회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648년 6월 20일 의회는 교회 징계, 시노드와 공의회, 결혼에 대한 장을 수정하여 신앙 고백을 승인했다.[2]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1647년에 수정 없이 신앙 고백을 채택했다. 1660년 찰스 2세의 복귀는 이 법을 무효화했다.[3]

  •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Larger Catechism)'''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Shorter Catechism)'''


1643년 12월과 1647년 1월 사이에 55개 문항을 포함하는 교리 문답(catechism)에 대한 중요한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하나의 교리 문답이 아닌 두 개의 교리 문답을 만들기로 결정했다.[4]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목회자들이 개혁 신앙을 회중에게 가르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고,[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대요리 문답을 기반으로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2] 총회는 교리 문답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요구했다.[3] 스코틀랜드 교회는 1648년에 두 교리 문답을 모두 승인했다.[4]

4.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은 1646년 8월에 서른아홉 개 조항을 대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신앙 고백 작성 과정에 대한 총회 활동 기록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교리에 대해 총회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앙 고백은 인쇄되어 12월에 의회로 보내졌다. 하원은 신앙 고백에 성경 구절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1648년 4월에 제공되었다. 의회는 1648년 6월 20일에 교회 징계, 시노드와 공의회, 결혼에 대한 장을 수정하여 신앙 고백을 승인했다.[2]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이미 1647년에 수정 없이 신앙 고백을 채택했다. 1660년 찰스 2세의 복귀는 이 법을 무효화했다.[3]

164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승인한 후 인쇄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초판 표지


총회는 영국의 개혁주의 전통의 산물이었으며, 제임스 어셔와 그의 1615년 아일랜드 신앙 조항, 39개 신조를 주요 자료로 삼았다.[4] 신학자들은 스스로를 더 넓은 유럽 개혁주의 전통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빈번하게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들의 승인을 구했다.[5] 또한 성서 지식을 강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통의 영향을 받은, 캔터베리의 안셀름, 토마스 브라드와딘, 존 위클리프를 예로 들 수 있는 종교 개혁 이전의 영국 신학 전통에 의존했다.[6] 총회의 기록된 논쟁에는 교부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인용문이 가득하다.

신앙 고백은 계시 교리, 즉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신학자들은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성경 교리는 당시 특히 중요한 논쟁 분야였다. 학자들은 히브리어 모음 부호(발음을 돕기 위해 텍스트에 추가된 표시)가 구약 원본의 일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개혁주의 논쟁가들과 로마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교도들은 이러한 발견이 교도권이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개신교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은 누구라도 해석할 수 있다는 성경의 명료성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개혁주의 작가들이 개혁주의 교리를 옹호하는 일을 맡았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에 대한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는 명제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믿었다. 성경 무오성(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믿음)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제기되었지만, 신학자들은 성경에 어떠한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지 않았다. 많은 신학자들은 다소 기계적인 관점에서 성경 영감을 보았고, 단어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텍스트의 글자와 모음 부호도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 반면에 그들은 텍스트가 인간에 의해 그들 자신의 스타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성경 영감과 관련하여 본질적인 문제와 부수적인 문제를 구별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역사와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도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의 작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구속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이 시기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원받도록 영원히 선택된 사람들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가르쳤는데, 이를 선택적 구속 교리라고 한다. 총회 신학자들 중 소수는 가설적 보편주의라는 입장을 주장했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선택된 사람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는다는 조건하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총회의 신앙 고백은 그러한 견해를 가르치지 않았고, 그 표현은 선택적 구속 해석에 훨씬 더 부합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신앙 고백의 표현이 가설적 보편주의 해석을 허용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다.[1]

에드먼드 칼라미는 총회에서 가설적 보편주의를 주장했다.


언약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해석적 틀로서 17세기에 크게 발전했다. 이 체계에 따르면, 총회가 명확히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두 언약, 즉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묘사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행위 언약(때로는 생명 언약이라고도 함)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주요 개혁주의 상징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제공하셨다. 타락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행위 언약을 깨뜨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주도권 없이 은혜 언약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제공하셨다. 이 언약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은혜 언약의 개념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훨씬 더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이 두 언약을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는 두 가지 주요 방식으로 서로 대립시켰다.

신학자들은 윌리엄 로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톨릭교와 연관시켰으며, 그들은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 내전 이전, 신학자들은 이 두 집단을 교회에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다. 전쟁 중 급진적인 종파 운동이 부상하면서, 신학자들은 가톨릭교에 대한 논쟁보다 이러한 집단에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학자들은 특히 율법 폐기론자(도덕법이 더 이상 기독교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에 대해 우려했다.

4. 2.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목회자들이 개혁 신앙을 회중에게 가르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대요리 문답을 기반으로 하지만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2] 의회는 또한 교리 문답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요구했다.[3] 스코틀랜드 교회는 1648년에 두 교리 문답을 모두 승인했다.[4]

요리문답 작성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재차 삼차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다. 루터, 칼빈, 우르시누스의 여러 요리문답과 비교해 볼 때,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심혈을 기울여 5년 동안 작성한 것으로, 그들의 노력과 헌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4. 3. 공중 예배 지침서

''공중 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Public Worship)''는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대체하기 위해 1644년에 작성되어 1645년 1월 3일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채택된 ''지침서''는 장로교와 회중교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장로교는 대부분 고정된 전례를 선호했고 회중교는 즉흥적인 기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지침서''는 예배 순서와 예시 기도문으로 구성되었다.[1] 총회는 또한 프랜시스 라우스(Francis Rous)에게 예배에서 사용할 시편 번역을 권고했다.

5. 총회 이후의 영향과 평가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서는 1660년 왕정복고로 잉글랜드에서는 효력을 잃었으나,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모두 채택되었다. 또한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유럽미국으로 퍼져나갈 때, 이 문서들은 교회의 기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5. 1. 잉글랜드의 종교적 상황 변화

의회의 청교도들은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5차례나 회의 소집을 요구했지만, 찰스 1세는 매번 서명을 거부했고, 하원의 조례로 준비되어, 겨우 5번째에 가결되었다. 이것은 귀족원에 의해 1643년 6월, 찰스 1세의 동의 없이 유효하게 되었다. 회의는 30명의 신도(10명의 귀족과 20명의 일반인)와 121명의 신학자와 목사로 구성되었다.[1]

교역자는 네 개의 파의 대표들로부터 선출되었다.[1]

첫 회의는 1643년 7월 1일에 열렸다. 회의는 1643년부터 1649년까지 1163회 열렸으며,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된 적은 없었다. 의회는 신학자들에게 하루에 4실링을 지급했다. 회의에 처음 주어진 임무는 국교회 39개 조항의 개정이었다.[1]

5. 2. 장로교회의 발전과 전파

1660년 왕정복고로 인해 잉글랜드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가 채택되지 못하고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모든 문서가 받아들여졌다. 또한,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유럽미국에서 세워졌을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문서는 그 기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5. 3. 평가

찰스 브릭스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모였던 목회자들의 일련의 설교와 기도는 세상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6. 총회의 경과

1643년 7월 1일 윌리엄 트위세의 설교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시작되었다. 총회는 1649년까지 1163회 열렸으며,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된 적은 없었다. 의회는 신학자들에게 하루에 4실링을 지급했다. 회의에 처음 주어진 임무는 성공회 39개 신조의 개정이었다.

총회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 와중에 소집되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이 찰스 1세 편에 서서 반란에 가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에 도움을 요청했다. 엄숙한 동맹과 계약이 체결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을 하고, 가장 잘 개혁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가톨릭적인 감독제의 근절을 요구했다. 그리고 6명의 스코틀랜드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했다.

1643년 10월 12일,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의회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합당하고, 교회와 가정을 보호하며, 스코틀랜드 교회와 다른 개혁 교회와 일치된, 계율과 교회 정치"에 대한 권고를 받았다. 회의는 그것을 받아 39개 조항의 수정을 멈추고, 새로운 신앙 기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4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만들었다. 하원은 이에 근거 성구를 요구했다.

1646년 총회는 의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에라스투스주의를 지지했던 영국 의회는 거부하였다. 1647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거부 의사 없이 즉각 받아들여 통과시켰다. 1648년 영국 의회는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 통과시켰다. 1661년 찰스 2세는 영국 의회에 통과된 고백서를 무효화시켰다. 1690년 윌리엄 3세메리 2세는 다시 통과시켰다.

교회 정치에 대해 감독제주의자, 장로주의자, 회중주의자, 에라스투스주의자 4개의 파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문서는 잉글랜드에서 채택되었지만, 1660년왕정복고에 의해 무효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모든 문서가 받아들여졌다. 또한,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가 유럽과 미국에서 세워졌을 때, 그 기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6. 1. 연도,월별 주제분류

연도월별주요 내용기타
1643년7월39개 신조
1643년10월교회정부에 관한 목록
1644년1월목회자 임직에 관한 목록
1644년2월교회정부에 관한 목록
1644년5월말예배에 관한 목록
1645년1월교회정부와 예배에 관한 목록
1645년6월성만찬 허락권
1645년7월교회정부와 신앙고백목록
1645년8월성만찬 허락권과 목회자 시험
1645년9월신앙고백
1646년4월교회 정부(유스 디비눔)
1646년6월교회 정부(유스 디비눔) 과 신앙고백
1646년7월교회정부(유스 디비눔)
1646년8월신앙고백
1646년9월신앙고백과 요리문답
1646년10월신앙고백
1646년12월요리문답
1647년1월신앙고백
1647년4월신앙고백
1647년5월요리문답, 목회자시험
1648년6월총회업무. 목회자 시험
1648년7월목회자 시험
1652년3월총회 종료


참조

[1] 기타
[2] 웹인용 신앙고백 해설 -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 / 김병훈 목사 http://rpress.or.kr/[...] 2020-02-10
[3] 저널 Westminster Assembly https://en.wikipedia[...] 2019-10-06
[4] 서적 The Creed of Presbyterians https://archive.org/[...] John Knox Press 1941
[5] 서적 The Westminster Assembly : reading its theology in historical context https://www.worldcat[...] P & R Pub 2009
[6] 서적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to the 21st century : essays in remembrance of the 350th anniversa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https://www.worldcat[...] Mentor 2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